조선시대에 글씨 잘 쓴다 하는 사람에게는 비문 글씨를 부탁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, 당대에 어떤 글씨를 가장 높게 평가했는지는 비석의 글씨를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지요. 설정 조문수 또한 석봉체의 느낌이 강한 비석 글씨를 많이 남겼습니다.
조문수가 쓴 이기(李巙)의 묘비 글씨
『근역서화징』 조문수 항목을 보면 오세창이 직접 남긴 평이 있습니다.
“붓을 댐에 맑고 깨끗한 취미는 없으나 해서가 초서보다 낫게 되었다. 그 뒤에 대대로 글씨 잘 쓰기로 이름난 자는 강씨와 조씨 두 집이 있는데, 조씨가 강씨보다 낫다.”
조문수의 글씨 위심수재서(爲沈秀才書) 보물(제1669호)
이중에서 ‘붓을 대는 데 있어 깨끗한 취미가 없다’는 부분이 재미있습니다. 한문 원문에서의 표현은 “下筆 無瀟洒之致”, 瀟(소)는 맑고 깊다, 洒(쇄)는 씻는다는 의미이므로 글씨를 쓸 때 맑게 트인 느낌이 없다는 것입니다. 그래도 진주 강씨 집안보다 창녕 조씨 집안의 글씨가 낫다는 의견을 덧붙였습니다.
진주 강씨 집안과 창녕 조씨를 비교한다고 하니 한 마디 더 하자면, 조문수에서 그의 5대손 조윤형에 이르기까지 조씨 집안에 글씨 잘 쓰는 사람이 많지만 선대의 글씨를 따라 쓰는 경향은 보이지 않는데 반해 표암 강세황의 진주 강씨 집안은 표암 이후 모두 그 글씨를 따라 써서 똑같이 생겼다는 점이 다릅니다. 표암은 그 윗대와는 다른 개성 있는 동기창 계열 글씨를 썼는데 그 이후로는 주욱, 표암의 오대손 글씨를 보아도 표암 글씨와 구분이 쉽지 않을 정도로 그 자손들은 강세황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. (표암은 북인, 조씨 집안은 서인 → 소론)
(참고 칼럼: 표암과 주변인들의 글씨)
표암의 증손자 대산 강진(1807-1858)이 청나라에 다녀와 남긴 서화첩의 그림과 글씨.
조윤형 집안과 이광사 집안의 연결고리
조윤형의 창녕 조씨 집안과 이광사의 전주 이씨 덕천군파 집안은 몇 차례 혼인으로 엮인 적이 있습니다. 조윤형의 큰할아버지인 조하언(曺夏彦1657-1699)이 전주 이씨 덕천군파 이정영(李正英, 1616-1686)의 딸과 결혼해 그의 사위였습니다. 이정영 또한 이광사와 함께 가문의 명필로 전해집니다.
이정영 <금성휘묘갈명두전(金成輝墓碣銘頭篆)> 탁본
조윤형의 손자 조석원의 아들이 지난번 칼럼 서두에 언급했던 조선 말기의 인물 조인승(曺寅承, 1842~1896)입니다. 조인승은 동기창 계통이지만 선비 글씨로는 가장 좋은 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. 깨끗하고 얌전하고 어떻게 보면 여성스럽다고 할 수 있는 동기창 글씨를 씁니다. 조인승의 장인도 덕천군파였는데, 같은 소론 집안이었습니다.
비슷한 시기 (전주 이씨 덕천군파) 이건창(1852-1898)의 글씨를 보면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.
이건창의 간찰 글씨
이들을 비롯해 소론들의 글씨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.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(1691-1756)도 소론으로 그의 글씨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. 약간 거친 면이 이광사를 떠올리게 합니다.
박문수, 간찰 《근묵》, 22.1x32cm, 성균관대학교박물관
비슷한 시기 글씨 잘 쓰던 사람 중에 해사 김성근(1835-1919) 같은 이도 있었는데, 글씨체는 조인승과는 조금 달라서 미불, 안진경의 영향을 보입니다.
(해사 김성근 글씨)